좌상공파 중조 휘 춘 알아보기
“ 좌상공파 중조 휘 춘 알아보기 ”

○ 左相公 事實錄 (좌상공 사실록)
좌상공(左相公)은 밀성부원군(密城府院君) 휘(諱) 彦孚(언부) 7世孫이며 성(姓)은 朴이요, 諱는 椿(춘)이신데 13세기에 탄생(誕生)하여 6세에 지학독서(知學讀書)하고 재기(才器)가 과인(過人)이라 14세에 이제(彛齊) 백이정 지문(白蓬正之門)에서 강학(講學)하여 문장과 무예를 익히어 후에 원나라에 들어가 등제(登第)하시고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어 익제 이제현(益齊 李齊賢) 목은 이색(牧隱 李穡)과 더불어 정주(程朱)의 학설(學說)을 강론(講論)하고 밀직제학(密直提學)이 되었다.
(河東鄭氏譜諜 家乘譜 및 孤直堂文集抄 - 하동정씨보첩 가승보 및 고직당 (諱 英喆- 左相公8代孫)文集에 기록되었는 것을 大同譜 首編359P에 옮겨 기록되어있음 -)
○ 高麗史 恭愍王朝編에서 抄 (고려사 공민왕조편에서 옮겨 씀)
공민왕 3年(1354년 甲午) 2월 乙酉에 채중하(蔡仲河)를 영동첨의(領都僉議)로 염제신(廉悌臣)을 우정승(右政丞)으로 유탁(柳濯)을 좌정승(左政丞)으로 염윤충과 원호를 찬성사(贊成事)로 최천택과 기륜을 삼사좌우사(三司左右使 - 正二品)로 김신 김경지 이진을 평리(評理)로 강지연을 평리상의(評理商議)로 박수년을 지도첨의(知都僉議 - 正二品)로 기완자불화를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 從一品)로 박춘(朴椿 - 左相公 中祖)을 밀직사사(密直司事 - 從二品) 강순용 강중상을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 正二品)로 강석 김보문을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 從二品)로 활재기, 박막, 최용자, 박군정, 지찬을 밀직부사(密直副使事 - 從三品)로 안보를 밀직제학(密直提學 - 正四品)으로 임관(任官)시켰다. 병신일에 왕은 공주와 더블어 연경궁(延慶宮)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3年 6月때는 아시아와 유럽에 군림하여 영화(榮和)를 자랑하던 대원제국(大元帝國)이 채조(蔡照)의 길을 더듬던 시기였다. 강남에는 홍건도(紅巾徒)의 반란(叛亂)이 불길처럼 퍼지고 있어 원나라 군사는 대토벌군(大討伐軍)을 남하(南下)시키는 한편 고려(高麗)에 대해서도 조정군(助征軍) 파병을 요청해왔다. 이에 고려에서는 명망있는 장군 채중하, 유탁, 염제신, 정세운, 최영, 이방실, 안우, 박춘(朴椿) 등 40명이 이천의 정기병(精騏兵)을 거느리고 원정(遠征)의 길에 올랐으며 원(元)나라에 있는 고려인 이만명과 함께 원나라 군사의 선봉으로 각지에서 빛나는 무훈(武勳)을 세웠던 것이다. (人物史 崔榮編 47p)
7年(1358년 戊戌) 4월에 최영을 양광(楊廣) 전라도(全羅道) 왜관(倭冠) 체복사(體復使)로 朴椿을 나주목사(羅州牧使)겸 全羅道(전라도) 존무사(存撫使)로 삼았다. (高麗史節要)
8年(1359년 己亥) 11월에 홍건적(紅巾賊)의 북변침입이 있어 서북면 원수 경부흥과 부원수 안우등이 홍건적을 처 쫒았으나 적(賊)이 선주(宣州)에 들어가 웅격하다가 12월에 사만병력으로 도압강(渡鴨江 - 결빙된 압록강을 건너다)하여 의주(義州), 정주(靜州), 인주(麟州), 철주(鐵州)등을 공함(攻陷 - 차례로 함락)할 때 시중 이암(李岩)을 도원수(都元帥)로 경부흥을 부원수(副元帥)로 김득배를 지휘사(指揮使)로 박춘(朴椿)을 도병마사(都兵馬使)로하여 군사를 이끌고 와서 모이매 我軍이 다시 떨치는지라 적의후기(後騎)가 정주에 이르거늘 안우경이 精氣三百을 거느리고 덮쳐 쳐서 그 장수 주신길(朱臣吉)을 생포하여 배를 갈라 순시하니 적이 기운을 빼았기는 지라 이에 안우경 이구수 안용수와 병마사 나세는 좌익(左翼)이 되고 이순, 우제 박춘(朴椿)과 이성계는 우익(右翼)이 되고 최영은 중군(中軍)이 되어 진격(進擊) 정주에 이르렀다. 그러니 서경(西京-京城)에 까지 휩쓸었던 홍건적은 대파(大破)되고 京城은 회복(回復) 되었다. (高麗史 列傳 9권499p)
9年(1360년 庚子) 출위나주목사(出爲羅州牧使)하여 토벌비적(討伐匪賊)하다 안 하동정씨보(按 河東鄭氏譜)하니 경렬공 정지(景烈公 鄭地) 년15(年十五)에 유어성시(遊於城市)이러니 가상(街上)에 우촉기주(牛觸其主)하여 기사하대 중막능구커늘 정지(鄭地)가 정신출하여 수집양각하여 휘박폐지시(麾搏斃之時)에 金城(현 나주) 재(宰) 박춘이 적재누상(適在樓上)하다가 견이장지(見而壯之)하고 소이이지(召而異之)하여 이녀로 妻 지하다. (경렬공파보사)
11年(1362년 壬寅) 2월 乙巳 왕의 전지왈(傳旨曰) "안우 등은 불충하여 제마음대로 도통사(都統使) 정세운을 죽였는데 만일 김득배 이방실을 잡는자가 있으면 三給을 올려 쓰리라" 대장군 오인택, 어사중승 정지상, 병마만호(兵馬萬戶) 박춘 김유등을 나누어 보내면서 가서잡아라 하였다. (高麗史節要 6권26p)
잡게한 이날에 이방실(李芳實)이 장군행재소(將軍行在所)에 나가고자 용궁현(龍宮縣)에 이르렀다. 왕이 방실의 구(舅) 우산기신순(右散騎辛珣)과 안렴, 성원규를 명하여 가서 맞이하게하니 박춘이 이르러 왕의 교지(敎旨)가 있다고 일으키니 방실이 뜰에 내려 꿇어 앉는지라 인택이 칼을 빼어 치매 곧 엎어져 기절하였다. 조금후에 다
시 살아나 담을 넘어 달아나니 박춘이 쫓아 잡았는데 방실이 춘의 칼을 빼았고자 하거늘 지상 등이 뒤에서 처서 죽였다. (高麗史 列傳 譯 9권485p) 2월 乙酉에 안우가 돌아와 行宮에에 나오거늘 김용이 문위로 하여금 이를 죽이게 하고 사자(死者)를 보내어 이방실 김득배를 분포(分捕)케하니 병마만호(兵馬萬戶) 박춘은 용궁현에서 방실을 죽였다. (高麗史 譯 4권88p)
11年 8月 경술(庚戌)에 좌정승(左政丞)유탁을 서북면 홍적방어(紅賊防禦) 제군도통사(諸軍都統使)로 밀직사(密直司)를 삼고 김한귀를 동경도로 허강을 안동도로 김진을 상주도로 이지태를 진주도로 성원규를 전주도로 임견미를 나주도로 김계생을 남경광주도로 박춘을 청주수원도로 유계조를 공주도로 장조제를 충주도로 김장수를 교주로 김유를 강릉도로 각각 병마사(兵馬使)로 삼았는데 이렇게 병마사를 둔 연유는 그때에 홍적(紅賊)의 성식(聲息)이 있었고 또 원사(元使)가 와서 홍적을 협공하라는 재명(宰命)을 전한 까닭이였다.
그러나 얼마 아니하여 적이 궤멸되었다는 말에 이를 정지하였다.
12年 閏 3월 乙酉에 11년 정월 홍적(紅賊)의 난과 동12월 최유의 란을 대파하여 경성을 수복한 공을 녹(錄)하여 찬성사상의(贊成事尙議) 황상, 정당문학(政堂文學) 한방신,지도첨의(知都僉議) 안우경,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이순, 밀직사(密直司) 최영, 지밀직사(知密直使)이구수, 밀직부사(密直副使) 우제, 유연, 한휘, 전밀직부사(前密直副使) 허헌, 개성윤, 양백익, 첨의평리(僉議評理) 이인임, 전리판서(典理判書) 오인택, 김귀, 예의판서(禮儀判書) 홍선, 전공판서(典工判書) 조희길 판도판서(判圖判書) 김한진, 전 판도판서(前 判圖判書) 김원명, 전 전공판서(前 典工判書) 김한귀, 전 판각문사(前 判閣門事) 김득제, 우상시(右常侍) 김광, 판사재사사(判司宰寺事) 권장수, 판내부사사(判內府寺事) 변안열, 종부사사(宗簿寺事) 이성계, 좌대언(左大言) 유계조, 응양군상호군(鷹揚軍上護軍) 박춘, 전 응양군상호군(前 鷹揚軍上護軍) 홍사우, 판종부사사(判簿부寺事) 지용수, 판사복사사(判司僕寺事) 박원택, 전상호군(前上護軍) 경보흥, 판사재사사(判司宰寺事) 김지서, 대호군(大護軍) 임견미, 나광만, 조사민, 목충, 이원림, 김양검, 김하적, 정윤,노철,전객, 전보호군(全保護軍) 김세견, 강영, 장용, 오육화, 전 호군(前 護軍) 유부조, 김강,친종호군(親從護軍) 김세덕, 판도총랑(判都摠郞) 박양길, 전 공정랑(前 工政郞) 하을지, 전 지분주사(前 知文州事) 박인규, 중랑장(中郞將) 박윤청, 환자,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김현, 온양부원군(溫陽府院君) 방절을 일등공신으로 삼고 벽상(壁上)에 도형(圖形)하고 그 부모 처에게 삼등 봉작(封爵)을 초수(超授)하고 그 아들 1명에게 七品벼슬을 주고 만약 아들이 없으면 생질녀서(甥姪女壻) 일명에게 八品벼슬을 주고 구사(驅史) 5명 진배 파령(把領) 7명은 초입사(初入仕)를 허(許-허락)하고 자손은 음직(蔭職)을 서용(敍用)하고 전(田) 일백결(一百結)과 노비 10명을 주다. (瑞亂一等功臣勳號) 동년 윤3월에 흥왕사변(興王寺變)"흥왕사(興王寺)에서 왕이 수복한 京都로 환도(還都)하게 되었을 때 宰相 김용이 行宮을 습격한 역모(逆謀)가 있었다" 을 토벌(討伐)한 부시피난(扶侍避難)하였던 공을 녹적(錄籍)하고 서녕군(瑞寧君)유숙 판전교사사(判典校寺事) 성사달 좌대언(左大言) 김달상 응양군상호군(鷹揚軍上護軍) 박춘, 환자,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김현, 상호군(上護軍) 이강달을 부시피난(扶侍避難) 일등공신으로 삼았다.
12年(1363년 癸卯) 임진(壬辰)에 도원수(都元帥) 이하를 서북면에 보내어 덕흥군(德興君)을 대비(對備)케함을 최유가 원(元)에 있으면서 재(宰)께 찬소(讚訴)하여 왕을 폐하고 흥덕군을 국왕으로 삼았고 기삼보노(奇三寶奴) 원자(元子)를 삼아 요양성의 병사를 발하게하니 통역 이득춘이 원으로부터 돌아와 왕에게 이사실을 알려주어 대호군(大護軍)까지 제수하여 보내고 곧 경천흥(慶千興)을 서북면 도원수로 둔안주(屯安州)하고 영제장(領諸將)을 각처에 둔(屯-진)치니 都兵馬使 朴椿은 강계(江界)독노강(禿魯江)등지에 나누어 진을치고 서북방을 방비하게하였다. (高麗史 節要 譯4권 118P)
추(秋) 七월에 원나라 使臣 이가노가 장차 온다는 말을 들은 박춘은 군사를 거두니 병졸 수천과 갑사(甲士 - 갑옷을 갖춘 군사) 이백여인이라 장이필을 생획(生獲)하고 가노의 막사에 나아가서 말하기를 "椿은 모처의 만호(萬戶)인데 관하는 천호나 됩니다. 왕이 椿으로 하여금 왜구(倭寇)를 막으라 하므로 여기에 왔더니 이제 폐위(廢位)한다는 말이 있으니 과연 그러합니까? 椿은 장차 우리왕을 위하여 죽을것입니다." 하고 인(因)해 눈물을 흘리며 장(獐 - 노루)을 죽여 먹이니 가노가 여조(麗朝)에 훌륭한 충신 있음을 탄식하면서도 또한 의구심이 있는지라 椿이 모인 사잇길로 따라 거느린 군사를 순(珣)의 둔소(屯所-진을 친 장소)에 보내어 순(珣)으로 하여금 가노를 만나 그와 같이 하라 하였다. (高麗史列傳 譯 9권 370P)
13年(1364년 甲辰) 春 정월 丙寅朔에 최유가 원의 군사 일만으로 덕흥군을 받들어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포위하거늘 도지휘사(都指揮使) 안우경이 일곱 번 싸워 이를 물리치고 다시 나가 더불어 싸우다가 도병마사(都兵馬使) 홍선이 사로잡히고 아군이 패(敗)하여 물러나와 안주(安州)를 보수(保守)하니 최유가 선주(宣州)에 입거(入據)하거늘 이에 왕은 찬성사(贊成事) 최영을 도순위사(都巡慰使)로 삼아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급히 安州에가서 제군(諸軍)을 절도(節度)하게 하고 또 이성계로 하여금 동북면에서 정기병(精騎兵) 일천명을 거느리고 출전하게 하였으며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순, 도병마사(都兵馬使) 朴椿, 우제 등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회합(會合)하니 아군은 다시 군세를 떨쳤다. 이때에 나세(羅世)는 홍선(洪瑄)에 대신(代身)시키고 최영장군은 中軍을 안우경 이구수 나세는 좌익(左翼)을 이순 朴椿 우제,이성계는 우익(右翼)이 되어 안주에서 진공(進攻) 정주달천(定州달川) 싸움에서 최유 대파하여 살아 도망간자 17인이라. (高麗史 節要 28권 國譯46P 또 4권122P)
2월초에 동북면에서 여진족(女眞族)이 입구(入寇)하여 화주이북(和州以北)이 함몰 되어 박춘, 이성계등과 같이 진공(進攻) 여진의 삼선(三善) 삼개(三介)가 대파(大波)되니 화함(和咸)의 제성(諸城)을 회복시켰다. 2월 무술(戊戌)일에 최영 (중략) 박춘 등이 개선(凱旋)하거늘 백관(百官)이 국청사(國淸寺)의 남교(南郊)에서 잔치하였다. (高麗史 節要 譯 4권 124P)
2월 己亥에 경복흥을 좌시중(左侍中)으로 최영을 우시중(右侍中)으로 (중략) 朴椿을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 이성계를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중략) 삼고 천하의 어지러움을 진정시켰다하여 정란(靖亂) 일등공훈(一等功勳)을 녹(錄)하고 노비와 전토(田土) 一白結과 자손에게 음직(蔭職)을 서용하였다. (高麗史 列傳 譯9卷407P)
14年(1365년 乙巳) 3월 庚辰에 유탁 경부흥을 시중(侍中)으로 최영을 좌시중(左侍中)으로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박춘을 우시중(右侍中)으로 이인복 송경 안우경 이구수를 병찬성사(병贊成事)로 삼아 치정(治政)케 하였다. 5월 庚辰일에 요승신돈(妖僧辛旽)이 왕에 찬간(讚間)하여 찬성사(贊成事) 이구수를 외원(會原)으로 評理 양백익을 춘주(春州)로 우시중(右侍中) 朴椿을 광양(光陽)으로 평성군(평城君) 석문성을 장암(長巖)으로 환자(宦者) 진원군 김수만을 이천(利川)으로 府院君 이녕을 옥천(沃川)으로 유배(流配)시키고 그집을 모두 몰적(沒籍) 하였다. 7월에 최영 이구수 양백익 석분성 朴椿 등은 三品이상 작위(爵位)를 삭제하고 김수만을 제명(除名)하고 아울러 그들의 전민(田民)을 몰적(沒籍) 하였다. (高麗史 節要 譯 4권 144P 列傳 649P)
15年(1366년 丙午) 8월 丙寅에 머리를 깍아서 이구수는 송광사에 김귀를 노산사에 박춘을 열엄사에 유치(留置)하였는데 신돈은 마침내 자기 무리를 파견하여 그들을 죽여버렸다. (高麗史 節要 譯 四권一 及 節要37頁)
신돈의 본명은 편조(遍照)인데 중의 첩실자식으로 태어나 걸인승(乞人僧)으로 있다가 공민왕 14년 3월에 세상의 대란(大亂)은 이미 평정되엇으나 고구려(高句麗) 영토인 요심땅을 찾을려고 國力을 배양(培養)하는데 14년 正月에 기왕후(奇王后 - 露國公主)가 죽자 왕은 음식(飮食)을 전폐(全廢) 화상(畵像)을 매일보며 울기만 하다가 하루는 몽중(夢中)에 사람이 칼을 빼어 왕을 죽일려고 하는데 중 한사람이 와서 生命을 구원(救援)해 주는 꿈을 깨고 왕은 조신(朝臣)에 命하고 중을 물색하라하여 김원명이 편조를 보이자 왕이 꿈에본 중과 같다하니 편조(遍照)는 도통(道通)한자라고 어전(御前)에서 스스로 호언장담까지 하다가 朝臣들에죽음을 당할 편조를 왕이 은익(隱匿)해주고 改名하여 신돈(辛旽)이라하고 누구나 얕보지 못하게 사전(師傳)로 국정을 자문케 하고 고작(高爵)을 주니 일자무식인 신돈은 폭학(暴虐)함이 날로 심하더니 청백(淸白)한 朝臣 高官들을 왕에 찬간(讚間)하여 유배(流配)나 죽이기를 마음대로 하니 사람들은 요승(妖僧)은 망국인(亡國人)이라 골법(骨法)이 옛 흉인(凶人) 같으니 필이후환자(必貽後患者)라고 청원(請願)키를 상소(上訴)하였으나 왕은 불청(不聽)하고 벼슬을 높이 올려주다가 왕을 죽이고자하는 역모(逆謀)의 비밀(秘密)이 누설된 신돈은 공민왕 20년 7월에 역모죄(逆謀罪)로 일당 모두 복주(伏誅)하였다. (高麗史 譯4권)
7월 이전에 신돈의 찬간(讚間)으로 쫓아내었던 이순 최영 안우경 윤환 한방신 이색 등은 복작(復爵)하고 왕이 이구수 박춘 석문성 김귀 등은 忠臣의 이까운 죽음을 추모하여 朴椿에게 추 좌시중(追 左侍中) 익문정(謚文定)하셨다.
○ 國史大事典編 抄
朴椿은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때의 장군(將軍) 1363년 공민왕 12년 癸酉에 원제(元宰)가 흥덕군을 고려왕으로 세우고 기삼실노(寄三實奴)로 원자(元子)를 삼아 요양의 군사를 일으켜 내침한다는 정보를 듣고 이를 방어할 都兵馬使가 되니 강계와 독노강 지역에서 수비의 책임을 맡았다. 후에 신돈이 횡포하여 구가세족(舊家世族)의 세력을 제거할때에 제일착으로 최영 이구수 양백익 석문성등과 같이 무함을 받고 물너 났다.
○凡 朴二千年史 抄
박춘의 초휘는 椿이니 고려공민왕 13년에 爲 將軍하다. 원나라 반신 최유의 찬언으로 원제(元帝)가 왕을 폐하고 흥덕군을 고려왕으로 세우고 요물 최의 군대를 파하여 국내로 들어오게하고 먼저 이가노를 보내어 왕의 인을 절취케 하고자 할 때 공이 도병마사로 강계 도노강에 유진(留陣)중 이가노가 장차 온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정비하여 이가노의 사관으로 가서 가로되 "나는 지금 모처관하(某處管下)의 만호라 해적을 막으려고 여기에 왔는데 지금 들으니 왕을 폐하고 다시 세운다하니 진실인가? 나는 왕을 위하여 죽고자 한다" 하고 눈물을 흘리며 장을 잡은 것으로써 이가노를 순히 대접하니 가노가 말을 듣고 탄식(歎息)을 하며 또 두려워 하였다. 또 사이길로 군사를 시켜 가노를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순의 진(陣)에 보내어 이순으로 하여금 가노 대접하기를 자기가 한것처럼 하라고 밀통 하였다.
이때 이미 최유는 비밀이 압록강을 건너서 의주를 치고 타주에 유진하므로 공이 이성계등과 같이 군사를 모아 드디어 토벌하며 강외로 물리치고 개선하니 곧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에 제수하였다.
신돈의 구세력을 제거코저 할 때 최영 이구수 양백익 석문성등과 같이 광양으로 유배되어 해를 입었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