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대군 및 12중조

“ 8大君 12中祖 ”







○ 8大君

八大君이란 新羅 시조왕 朴赫居世王의 29世孫 景明王(경명왕)의 아홉왕자중 마지막왕자 국상공(國相公) 諱 交舜(교순)을 제외한 여덟분 대군을 지칭한다.
경명왕은 신라 54대 임금(재위 서기917-924년)으로 諱는 昇英(승영)이다.
후삼국(新羅 甄萱의 後百濟(후백제) 弓裔(궁예)의 泰封國)이 정립하여 패권을 다투던때 왕위에 올라 기우는 國運을 건지려고 애썼으며 견훤(甄萱)의 압박이 심하여 새로 建國(건국)한 高麗 太祖 王建의 도움을 받기도 한다. 在位 7년만에 아우 景哀王(경애왕)에게 왕위를 넘기고 昇遐(승하) 하셨다.


1. 密城大君(밀성대군)


경명왕의 장자로 휘는 彦忱(언침 - 始祖30世孫)이다.
密城(밀성 - 지금의 밀양) 城主(성주)로 봉작(封爵)되었기 때문에 그후 本貫(본관)을 密城 또는 密陽으로 하였다.
밀양은 원래 삼한시대에 변한(弁韓)의 일부로 가락국에 속하였으며 신라 법흥왕(제23대왕 재위기간:514~540)때 신라에 병합되어 추화군이 되었다 가 757년(경덕왕16년) 밀성군(密城郡)으로 개칭되었다.

중조의 묘소는 실전되고, 전설로만 밀양읍 영남루 광장에 있었다고 전해 져 오다가 1921년 여름, 심한 폭우가 쏟아져 산사태를 이루면서 영남루 북쪽 광장에 드러난 커다란 구덩이가 전문가들의 조사에 의해 밀성대군의 묘소임이 확인되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 제단을 설치 매년 음력 3월 3일과 9월 9일에 향사 하고 있다.

밀성(밀양)박씨의 세계는 중시조 박언침의 8세에서 6파로, 그 아래에서 다시 6파로 나뉘어 크게 12파로 분파되어 파마다 중조를 두고 있으며 이들 은 각기 또 여러 소파로 분파되어 내려오고 있다. 12파로는 문하시중공( 門下侍中公) 언부(彦孚)파, 도평의사공(都評議事公) 언상(彦祥)파, 좌복야 공(左僕射公) 언인(彦仁)파, 밀직부사공(密直副使公) 양언(良彦)파, 판도 판각공(版圖板刻公) 천익(天翊)파, 삼사좌윤공 (三司左尹公) 을재(乙材) 파, 규정공(糾正公) 현(鉉)파, 사문진사공(四門進士公) 원(元)파, 밀성군 (密城君) 척(陟)파, 밀직부원군(密直府院君) 중미(中美)파, 영동정공(令同 正公) 원광(元光)파, 정국군(靖國君) 위(葳)파 등으로 나뉜다.


2. 高陽大君 (고양대군)

高靈朴氏의 중시조로 諱는 彦成이다 경명왕의 둘째아들로 高陽大君으로 봉작되어 본관을 高靈이라 하였다.
고양(高陽)은 본래 대가야국으로 562년(진흥왕23) 신라에 합병된 후 경덕왕 때 고양으로 개칭되었다가 그 후 다시 고령으로 개칭되었기 때문에 본관을 고령으로 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조 이후 세계가 실전되어 계대가 불가능하므로 어사공파 파조 박섬(朴暹), 부창정공파 파조 박환(朴還), 주부공파 파조 박련(朴連) 등을 각각 起一世 (기1세)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3. 速咸大君(속함대군)

咸陽朴氏의 중시조로 諱 彦信이다. 경명왕의 셋째아들로 速咸大君에 봉해 짐으로써 후손들이 그를 중시조로 하였다.
그러나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조에 예부상서를 지낸 박선(朴善)을 1세조를 하고, 본관은 속함(速咸) 이 함양(咸陽)의 고호이므로 함양으로 하였다. 1세조의 묘소는 경남 함양군 함양읍 사금동에 있다.


4. 竹城大君(죽성대군)

竹山박씨의 중시조로 諱는 彦立(언립)이다.
경명왕의 넷째아들로 고려초 三韓壁上功臣(삼한벽상공신) 太保 三重大匡 (태보 삼중대광)으로 鷄林君(계림군)에 封해 졌다가 그후 죽주백에 改封 되고 竹州(죽주 - 죽산의 古號)를 食邑(식읍)으로 下賜(하사) 받았다. 그리고 죽주가 죽산으로 개칭 되었기 때문에 본관을 죽산(竹山)으로 하게 되었다.


5. 沙伐大君(사벌대군)

諱는 彦昌으로 경명왕의 다섯째 아들로 商山(지금의 尙州) 박씨의 중시 조다.
沙伐大君(사벌대군)에 봉해지고 沙伐防禦將(사벌방어장)으로 외적을 막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신라는 고려와 후백제 의 침략을 받아 국토가 낙동강 동쪽으로 축소됨에 따라 沙伐州가(사벌주) 고립 되자 이를 지키기 위해 국민을 단합시켜 沙伐國(사벌국)이라 칭하고 王으로 자립, 통치하다가 11년 만에 후백제에게 패해 망했다. 이 사실은 조선조 11대 임금 中宗(서기1506~1544) 때의 학자 이언적 (李彦迪)이 사벌국사 를 저술, 비장했던 것을 후손 박세준(朴世俊)이 발췌, 유전함으로써 밝혀 졌다. 그러나 중조 이후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때 덕천창 부사를 지낸 諱 甄(견)을 1세조로하고 사벌국이 고려초에 商山國으로 改稱(개칭)되었 으므로 본관을 商山으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6. 完山大君(완산대군)

경명왕의 第六子로 諱는 彦華이다. 完山(지금의 전주)大君으로 封해져 그 후손들이 본관을 全州로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우리 나라 박씨는 모두 박혁거세의 후손으로서 주로 경명왕의 아들 8대 군 아랫대에 분적되었는데, 이 전주박씨에서도 무안(無顔) 우주(紆州) 순창(淳昌) 평택(平澤) 안남(安南) 등의 朴氏가 분적되었다. 1930년도 국세조사에 의하면 그 후손들이 주로 함경남북도에 분포되어 있는 것으 로 나타났는데 언제 입북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중조 언화 의 아들 박웅(朴雄)이 고려 개국공신에 올랐고, 증손 박보진 (朴輔辰)은 완산군에 봉해졌으며, 7세손 박혁(朴奕)은 평장사를 지냈다.


7. 江南大君(강남대군)

경명왕의 일곱째 아들로 諱는 彦智이다. 그 아들 英規(영규)를 中始祖로 순천박씨를 형성하고 있다. 그는 후백제 견훤(甄萱)의 사위로 훤장군이 되었는데 935년 견훤이 왕위 승계 문제로 맏아들 신검(神劒)에 의해 금 산사에 유폐되었다가 탈출, 태조 왕건(王建)에게 투항하자 그도 이듬 해 태조에게 사람을 보내어 귀부(歸附)할 뜻을 비치고 태조가 신검을 칠 때 내응하여 후백제를 멸망시켰다. 그 공으로 좌승(左丞)에 임명 되고 승주군 에 봉해졌으며 전답과 말을 하사받았다. 그러나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고 려 충혜왕 때 보문각 대제학, 관동존무사를 지낸 박숙정(朴淑貞)을 1세조 로 하였다.

중조와 1세조 사이에 고려조에서 평양부원군에 봉해지고 죽어서 순천 인제 산의 산신이 되었다는 박난봉 (朴蘭鳳)을 득관조로 하였는데, '여지승람 (輿地勝覽)'에는 '난봉이 영규의 증손이요, 숙정의 6대조다'하였으나 '순 천박씨세보(順天朴氏世譜)'에는 세계를 알 수 없다고 하였다.
본관은 중조 영규의 아버지인 언지가 봉군된 강남(江南)이 순천의 형승 (形勝)을 가리키는 것이고, 또 중조의 발상지인 순천이 신라 때 승평 (昇平), 고려조에 승주(昇州) 등 으로 불려지다가 충선왕 때 순천을 개칭 되었기 때문에 순천으로 하였다.


8. 月城大君(월성대군)

경명왕의 第八子로 諱는 彦儀다. 월성대군에 封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월성으로 하였으며, 월성이 경주로 개칭된 연유로 경주박씨라고도 한다.
월성 박씨는 고려말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조선 초에 크게 성장하였다. 중조 언의의 13세손 박구(朴龜)는 고려말에 중군사정 부령 등을 지내 다가 고려가 망하자 인천의 장아산에 은거, 태종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산 위에 망경대를 세워 송경(松京)을 바라보며 통곡하다 죽었다. 그의 아들 박간은 태종 때 문과에 급제, 세종조에 청양현감, 단종조에 성균관 대사성 경주부윤, 성종조에 이조참판 판의금부사 등을 지냈다. 간의 아들 박휘지(朴徽之)는 장례원 판결사 대사헌을 지냈다. 그는 신겸(信謙) 호겸(好謙) 종겸(宗謙) 아들 3형제 를 두었는데, 둘째 호겸의 후손이 가장 번창했다.